“승주야! 잘 지내지? 나 원이야.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오빠 엄청 오랜만이에요 당연히 기억하죵 ㅋㅋ 전 베리베리 잘 지내고 있어요 ㅎㅎ 오빠도 잘 지내고 있죠??” “응응!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댈러스 출장 가는길인데 문득 생각나서~ 혹시 혼자가서 먹어도 괜찮을 맛집 있음 추천부탁해 ㅎㅎ” 텍사스에서 진행되는 컨퍼런스 지원 차, 댈러스로 가는 길이었다. 출장을 싫어했다. 하물며 여행도 싫어했다. 낯선 곳의 모든 것들은 나에게 알아 내야 할 숙제와 같았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검은 피부의 두 배는 커 보이는 사람, 새로운 표지판,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 나에게는 보고 파악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숙제였다. 5살이 되었을 때 나는 서독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엄마 치마폭 5미터 밖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나에게, 게르만 족 특유의 융통성 없는 킨더가르텐 교육 방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킨더가르텐 선생이 나를 어깨에 들쳐 매고 엄마에게서 나를 떼어 내던 유치원 입학식 날은,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내가 2주 동안 매일 같이 울어서,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여행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동시에, 내가 속한 세상과 나를 분리시켜 스스로를 관찰하고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라고들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재주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행이 싫었다. 힘겨움의 연속 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 행선지에 대해 알아 보는 것만도 쩔쩔 맸다. 어느 날, 퉁명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난 여행을 싫어해.”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인정하게 된 셈이다.
“오 달라스 출장 와요? ㅎㅎ 어디 쪽에 있을 예정인데요?” “응응 aloft 호텔쪽이야! 와 승주 인스타에 맛있는거 많다” “아아 어빙 쪽이네요 그쪽에 뭐 별거 없을텐데 ㅠ.. 출장은 벌써 온거에요?” 사실 우리의 첫 만남은 몇 년 전 시애틀이었다. 미국에 살게되면서 처음으로 나간 교회에서, 눈에 띄도록 예쁜 친구가 있었다. 그때는 서로에게 집중할 기회가 없었지만, 승주는 매력이 넘치는 친구로 소문이 자자했다. 나와는 인연이 없는, 그런 예쁜 친구이겠거니.. 했다. 분명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남자들의 작업도 지겨울 테다. 하지만 뜻 밖이었다. 승주는 내 진부한 수작에 살갑게 응했고, 우리는 그 뒤로 자주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새로운 메시지 알림 소리는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승주의 메시지를 읽으면, 사춘기 소년의 철없는 히죽거림이 그대로 얼굴에 만연했다. 그 모습을 이제 와 돌이켜보면, 조금 우스우면서도 징그러울 것 같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승주에게 전화를 걸었던 내 모습은 생생히도 기억난다. 문자로 연락한지 몇 주가 지났을 때였다. 서로에 대해 한참을 묻고 답하고 뻔한 농담에 반응을 살폈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내 모습은 초조했다.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쿨내 진동하는 의사표현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내 감정의 기복도, 그녀 주변에 반응하는 나의 행태도. 그녀라는 거울을 통해,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승주와 나란히 걸으며 여행을 하게 되면, 그 전에 알 수 없었던 자유와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아하 오키키 좋다 버거~~~ 고마워!!! 너무 뜬금없이 연락줬는데 친절히 알려주고 너무 고맙다. 난 이제 일 마치고 잘라고 하는데 은근 2시간 차가 좀 어렵네 ㅋ 인스타에서 소식 들을게!” 운명은, 우연에 의지가 섞였을 때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우리의 의지는 운명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 우리는 수천 마일을 오고 가며 매주 만났다. 쏟아지는 별을 보러 가기도 했고, 시내 곳곳에 숨겨진 맛집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태어나서 가 본 적 없는 동유럽으로 가기도 했으며 우연치 않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쫓아 광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은채 춤을 추기도 했다. 그녀와의 일상은 내가 느끼고 싶었던 여행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오감이 열렸으며 그녀를 통해 나를 보게 되었다. 순간 순간 카메라를 들고 한 칸씩 사진을 채워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시간은 덧 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나갈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켜내려 애쓰는 순간의 발열, 그게 사랑의 온도일 것이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타오르는 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그 불을 꺼지지 않게 하려는 오랜 노력이 아닐까. 승주와 이제 한지붕 아래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거짓 없이 행복하게 지내려는 노력을 평생토록 함께 해 볼까 한다. 그녀가 수락했기에, 한결 수월하지 싶다. (유부남 유부녀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건 나만의 착각일까)